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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궁금할 대구, 경북의 숨은 이야기!


1915년 8월 15일 대한광복회라는 항일조직이 달성토성에서 결성되었다.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힘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대한광복회는 독립군 양성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 친일세력 처단 등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평안도, 함경도에 지부가 생겼을 만큼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918년 일본에 발각되어 조직을 이끌던 박상진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달성토성에서는 이 귀한 역사를 기념하고자 2018년부터 매년 대한광복회 결성 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족제비과에 속하는 수달은 멸종위기종이어서 현재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대구 도심을 흐르는 하천인 신천에서 최초로 수달이 발견되었다. 수달 발견 소식은 곧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수달이 산다는 것은 신천 생태계가 깨끗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019년 무인카메라 등을 이용한 관찰 결과에 따르면 24마리의 수달이 신천과 금호강 지역에서 관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안한 것은 남성들이었지만, 여성들도 적극 동참하였다.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선 부인 7명이 주도하여 국채보상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만든 모금 조직이었다. 기금 모임에 참여한 여성들은 결혼때 마련한 보석 등의 패물을 기부하였다. 대구 패물폐지부인회 활동이 알려진 후 다른 도시에서도 여성들이 만든 모금 조직이 여럿 만들어졌다.
대구시 남구의 대표 축제로 매년 봄에 열리는 이 축제는 앞산 빨래터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빨래터공원이라는 이름은 앞산의 맑은물이 모인 곳에 마을 공동 빨래터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축제 기간이 아니더라도 앞산빨래터공원에는 해넘이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서양 현대예술이 이 땅에 전해진 것은 20세기 초였다. 이 때 대구에는 서울 못지않은 속도로 문학, 미술, 음악을 비롯한 서양 예술이 전파되었다. 음악 분야를 예로 들면, 1910 년경부터 대구의 학교에선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관악대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양 악기인 피아노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처음 들어 온 것은 1901년. 이 피아노는 1907년 개교한 신명여학교에 기증되었고, 이때부터 대구에는 피아노를 이용한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초부 터 현재까지 대구는 각 분야에서 많은 유명 예술가를 배출해 왔다.
1907년 대구 시내를 둘러싼 대구읍성 철거가 완료되고, 읍성이 있던 자리에 동서남북으로 새로운 도로가 생겼다. 동성로는 이때 생긴 길로, ‘대구읍성 동쪽에 난 길’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로의 길이는 약 920m로 대구역에서 옛 중앙파출소가 있는 곳까지 뻗어 있다. 동성로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대구백화점인데 1969년에 들어선 건물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대구백화점 앞은 대구 시민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1951년 계산성당에서 한 젊은 신학생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한국 천주교를 이끄는 최고지도자인 추기경이 된다. 그의 이름은 김수환이었다. 김수환은 추기경으로 있을 때나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천주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해서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을 ‘귀화’라고 한다. 대한민국에 귀화하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법무부장관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세계화 시대인 까닭에 우리나라에 귀화하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중에는 연예인, 운동선수도 있다.
대구에도 귀화해 대구 시민이 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19년 12월 12일에도 대구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문화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적 증서 수여식에 125명이 참가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귀화인들은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게 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자매도시
미국 애틀랜타시, 밀워키시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중국 칭다오시, 닝보시, 청두시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일본 히로시마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불가리아 플로보디프시

대만 타이베이시
이탈리아 밀라노시

베트남 다낭시 

 

우호협력도시
중국 양저우시, 옌청시, 선양시, 사오싱시, 우한시, 창사시
일본 고베시
베트남 호치민시

태국 방콕시
대만 가오슝시

베트남 박닌성

프랑스 릴 메트로폴시

2003년
세계 대학생 스포츠 대회인 유니버시아드대회(하계 대회)가 열렸다.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World Ener- gy Congress)를 유치하였다. 94개국의 회원국과 에너지업 계, 정부관계자, 관련 국제기구와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국제 행사였다.  

 

2015년
경북과 공동으로 제7차 세계 물포럼을 개최하였다. 세계물포럼은 세계물의 날(3월 22 일) 전후로 3년마다 열리는 행사로 세계의 정부 관계자들, 물 관련 전문가와 NGO 등이 참가한다.

1984년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아스팔트 대신 콘크리트를 써서 포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였다. 단점은 왕복 2차로여서 통행에 불편이 있었다는 것. 그 후 31년 만인 2015년에 도로 전 구간 이 왕복 4~6차선으로 확장됐고, 도로명이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바뀌었다. 길이가 176km인 이 도로는 대구에서 시작해 경상남도 함양군– 전라북도 남원시 지역을 거쳐 광주를 연결한다.

서문시장
조선 중기에 생긴 시장으로 오늘날에도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다. 대구 사람들은 서문시장을 ‘큰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염매시장
대구 약령시가 있는 남성로에 있다. 조선 말기 대구읍성이 강제 철거되고 약령시가 현재 위치로 옮겨올 때 약령시 근처에 생긴 시장이다.   

 

칠성시장
일제강점기에는 과일, 채소를 주로 거래하던 조그만 시장이 었는데, 1946년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상설시장이 열렸다. 그 후 북문시장을 중심으로 상가 건물이 하나둘 생기면서 지금은 대구에서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시장이 되었다. 

 

교동시장 & 남문시장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대구의 인구는 늘어났다. 전쟁 시기에 대구에는 새 시 장이 여럿 생겼다. 교동시장과 남문시장 같은 곳들이었다.

지금 50~60대 이상의 어른들이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지로 가장 많이 간 곳이 경주였다. 지금 중학생의 엄마 아빠 사진첩에도 경주에 수학 여행을 가서 찍은 기념사진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수학 여행 1번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경주에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꼭 가는 곳이 있었다. 불국사와 첨성대였다. 이 중 단체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곳은 불국사 앞이었다.
사과는 연근보다 앞서 대구의 특산품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과일이었다. 대구는 분지 지형이라 일교차가 커서 사과 재배에 알맞은 땅이었다. 1899년 대구에 온 존슨이란 미국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 온 사과 묘목을 처음 심었다. 그 후 대구에서는 사과 품종 개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대구 근교에는 많은 사과 과수원이 생겼다.
대구 사과는 맛이 좋아서 한국 사람들이 ‘사과 하면 대구 사과’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또 대구 여성들은 평소에 사과를 많이 먹어서 얼굴이 예쁘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기후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사과 재배지는 대구의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팔공산 기슭에는 대구 사과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은 대구시 동구에 있는 ‘평광 왕건사과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과 재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대구에 있는 여러 공업단지 중에서 최초는 1936년 침산동에 조성된 공업단지다. 이곳에는 직물공장이 제일 많았는데, 1946년 3월에는 한국 최초의 안경 제조 공장인 ‘국제 셀룰로이드공업사’가 입주한다. 현재 대구시는 빈 건물과 공장터만 남아 있는 이곳을 역사성을 살린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관련 사업을 추진 중 이다.

달성공원
삼국시대부터 대구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였던 곳. 문화재로 지정된 토성과 관풍루, 향토역사관 등이 있다. 달성공원역 인근에 있다.   

 

건들바위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명물로 건들바위역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바위 주변에 맑은 하천이 흘러 아름다운 낚시터로 유명했던 곳이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대봉교역에서 걸으면 약 15분 가량 걸린다. 가수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테마로 한 350m의 벽화 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수성못
수성못역에서 내려 만날 수 있는 대구의 명소. 과거 수성구가 도시화되지 않았을 때는 주변의 논과 밭에 물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야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각각의 도시를 대표하는 나무와 꽃을 시목, 시화로 지정하고 있다. 1972년에 정한 대구의 시목은 전나무이며, 시화는 목련이다. 전나무는 곧게 뻗어가는 성질이 있어서 굳은 기상과 영원성을 상징하며, 목련은 순박하고 순결한 시민 기질을 나타낸다.
경상북도에선 조선시대 말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허위(경북 선산), 이강년(문경), 신돌석(영덕) 같은 의병 지도자가 활약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안동 지역에선 이상룡, 김동삼 등의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 이 역사를 기념해 현재 안동에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대구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부터 아주 오랫동안 대구의 중심은 현재의 대구시 중구 지역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구는 중구에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80년 전까지 대구에는 5개의 구가 있었다.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였다. 인구와 면적이 늘어나면서 대구에는 새로운 구가 생겼다. 1980년에 수성구가 생겼고, 1988년 달서구가 새로 생겼다. 이어 1995년 달성군이 대구시의 가족이 되었다.
대구읍성 철거 후 일본은 경상감영 안에 있는 시설들을 많이 철거하였다. 그중 하나가 경상감영 객사(손님들이 묵던 숙소)였던 달성관이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달성관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 사람들은 달성관 앞으로 몰려가 밤을 새워 가며 항의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동원해 농성하던 사람들을 해산시킨 후 달성관을 허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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