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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궁금할 대구, 경북의 숨은 이야기!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프랑스 수도 파리에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국제 관계를 의논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때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김창숙 등 경상도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벌였다. 이것을 파리장서운동이라고 한다. 장서(長書)란 사연을 길게 적은 편지를 뜻한다. 일본은 선비들의 집단 독립운동이 있은 후 이 운동을 주도 한 여러 사람을 체포하였다.

국가기념일이란,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일을 뜻한다. 정부는 그 기념일마다 전 국적 또는 지역적 규모의 의식과 행사를 주관한다. 2・28 민주운동은 2018년 국가기념일로 공식 공포되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결정적인 날인 4월 19일도 국가기념일이다.
* 독립을 주장하는 글, 독립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글을 써서 대구시내에 배포
* 독립운동이 활발한 만주지역에 혜성회 조직원을 파견하여 국내외 항일투쟁 연결 시도
* 민족자본가들에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 보내기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든 청소년 수련 조직이다. 화랑도를 이끌던 사람을 화랑이라고 불렀다. 화랑도는 15~18세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 화랑도의 구성원들은 단체로 무예와 학문을 연마하였다. 또 금강산 등 큰 산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국토애를 키웠다. 화랑은 신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였다. 특히 화랑도 출신의 많은 인물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화랑도 출신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와 독도 지역에 출몰하여 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이 종종 충돌했다. 1693년 안용복이 이끄는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충돌해 납치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안용복은 그런 처지에서도 일본의 지도자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당당히 주장했고, 결국 그로 부터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는 조선의 영토’라는 인증문서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안용복은 1696년에도 고기잡이를 하다 발견한 일본 어선을 마쓰시마섬까지 추격해 그 지 방 지도자로부터 영토 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한 일이 있었다.
대구시 동구 효목동 금호강변 에 있는 동촌유원지는 1918년 처음 유원지가 조성된 이래 오랜 시간 대구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된 곳이다. 강변의 남쪽엔 절벽이 우뚝 솟아 금호강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또 소나무, 포플러나무, 아까시나무, 참나무가 강변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곳이다.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도 시원하게 뻗어있다.
달서구 대곡동에 있는 대구수목원은 244,630㎡ 규모로, 그린시티 대구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2002년 문을 연 이곳은 전국 최초로 생활쓰레기 매립장에서 생태 공간으로 재 탄생했다. 대구수목원은 침엽수원, 활엽수원, 화목원, 야생초화원, 약용식물원, 염료원 등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400여 종 6만 그루의 나무와 1300여 종 27만 포기의 초화류가 자란다. 도심에서 가까운 도시형 수목원으로 체험학습 장소로도 인기가 많다. 환경부가 지정한 자연 생태 우수 사례지이기도 하다.
‘도시 숲’은 도시 지역에서 보건, 휴양, 정서 함양 등을 위해 조성하는 산림 및 수목을 말한다. 공원, 학교 숲, 산림 공원, 가로수가 여기에 속한다. 도시 숲은 여름철에 숲 근처 공간의 기온을 낮춰 주는 역할을 한다. 자동차의 경적같은 도시 소음을 줄여 주는 것은 물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는 대기정화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요즘들어 특히 심각해진 황사나 미세먼지 문제에도 좋은 해결책이 된다.

강 주변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경상북도 도 그러한데, 대표적인 평야 몇 곳을 소개한다. 

 

금호평야
금호강이 흐르는 곳에 형성 된 이 평야는 동서 길이가 약 50km에 달하는 경북 최대 평야이다. 포도 등 과일을 많이 키운다. 

 

안계평야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평야이다. 낙동강의 지천 중 하나인 위천이 안계평야 근처를 흐르고 있다. 이곳에선 주로 쌀을 생산한다. 

 

풍산평야
안동시에 있는 풍산평야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평야로, 오랜 시간 낙동강에서 흘러내린 흙으로 만들어진 충적평야이다.
이들 평야 외에도 경주 주변에는 안강평야, 낙동강 근처의 상주 지역에는 상주평야가 있다. 또 동해안 근처 영덕군에는 영해평야가 있다.

1407년 조선 정부는 경상도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었다. 이때 경상좌우도의 경계가 된 것이 낙동강이었다. 낙동강 서쪽 지역을 경상우도, 낙동강 동쪽 지역을 경상좌도로 한 것이다. 1519년 조선 정부는 경상좌우도를 다시 경상도 1개 도로 통합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군사적인 목적에서 잠시 경상좌우도로 나누었다. 경상도가 경상남도, 경상북도로 나눠진 것은 전국을 13개 도로 나눈 1896년이었다.
경상북도의 각 시와 군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들이 있다. 포항시와 영덕군에 걸쳐 있는 내연산은 폭포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상주시와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도군과 경상남도 밀양시에 걸쳐 있는 운문산에는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운문사가 있다. 이 외에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에 있는 조령산, 경상북도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에 걸쳐 있는 황악산,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인 구미시의 금오산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 신천은 홍수가 나면 범람해서 큰 피해가 발생해 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조선 정조 때 대구의 판관(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벼슬)이서는 주민들의 이런 어려움을 살펴 자신의 돈을 들여 제방을 쌓고 신천의 물길을 돌렸다. 이후로는 홍수의 피해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주민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제방을 ‘이공제’ 라 칭하고 비석을 세웠다. 현재 대구 상동 용두방천 맞은 편 이서공원에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대구의 동네 이름 중엔 산이 들어가는 곳이 여럿있다. 대구시 중구의 봉산동은 예로부터 신성한 새로 여긴 봉황이 앉은 산 아랫마을이어서 봉산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 에 나오는 봉산은 거북바위가 있는 연귀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은 대구 도심에 있는 162m의 작은 산인 아미산 남쪽에 있는 동네여서 남산동이 되었다. 또 대구시 달서구의 용산동은 대구 서쪽의 와룡산(용이 누워 있는 모양의 산) 근처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시작을 설명해 준 소중한 기록이다. 또 『삼국사기』에 없는 가야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어 더없이 중요한 가치가 있다. 역사서이면서 민간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는데, 민간에서 전해지는 설화나 다양한 민속과 풍습, 마을의 유래, 자연환경을 포함해 승려와 절,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 또 고대 시가인 향가 14수를 실어 한국 고대문학을 풍성하게 한 공로도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보물이라 할 만 한 책이다.

고려시대의 노래 중에 왕이 직접 지었다는 〈도이장가〉가 있다. 도이장가란 두 명의 장수를 애도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김락을 기리는 노래이다. 예종은 팔관회 때 두 장수를 추모하는 가면극을 보고 감동해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이 노래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님을 온전히 하시는 마음은 하늘가에 미치시니 넋은 가셔도 삼으신 벼슬만큼은 또 하는구나. 오오 돌아보건대 그때의 두 공신이여
오래되었으나 곧은 자취는 나타나는구나.”

팔공산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는 가산은 901m의 높은 산이다.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가산산성(사적 제216호)은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이라는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조선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이 산성이 있는 가산 지역에선 1950년 한국전쟁 때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대구시 북구 칠곡에는 이곳 출신의 소설가 이태원(1942~ 2008)을 기념하는 이태원길과 이태원문학관이 있다. 이태원은 칠곡을 배경으로 그 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객사』 를 썼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서 손님을 대접하고 숙소로도 사용한 집을 말한다. 대구를 배경으로 한 최근 작품에는 2012년 출간된 소설가 조두진(1967~  )의 『북성로의 밤』이 있다. 1940년대 북성로에 있었던 ‘미나카이백화점’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 당시 대구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들어서도 대구는 많은 문학가를 배출하였다. 대구 출신의 문학가들 상당수는 학창 시절에 문예반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부터 대구는 고등학교의 문예반 활동이 매우 활발한 도시였다. 각 학교 문예반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동기’(대건고), ‘계단’(대구고), ‘씨알’(대륜고), ‘알암’(정화여고), ‘코스모스’(제일여상), ‘햇살’(경북여고), ‘돌탑’(경북고), ‘울림’(효성여고)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 문예반 학생들은 연 1~2회 시화전,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백일장에서 각자의 솜씨를 뽐냈다. 문예반 활동으로 실력을 키운 대구의 학생 중 아주 많은 사람이 훗날 소설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문학 활동을 함께 했던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그리고 이상백(이상화의 동생) 네 사람은 1917 년 그들이 쓴 시를 모은 시 동인지 「거화(炬火)」를 펴냈다. 거화는 횃불을 뜻한다. 이 네 사람 중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은 한국의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이상백은 광복 이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사회학 보급과 한국 체육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한국전쟁 기간에 많은 예술가들이 녹향을 찾았다. 단순한 음악감상실이 아닌 일종의 예술 창작 공간이었던 셈이다.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이 탄생한 곳도 여기였다. 가난 때문에 종이 대신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의 은박지 그림은 가난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녹향의 또 다른 단골손님으로 시인 양명문이있었다. 그가 지은 시 「명태」에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여 탄생한 〈명태〉는 유명한 가곡이 되었다. 노래가 완성된 후 양명문 시인은 “이 가곡을 이창수 님에게 바칩니다.“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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