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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궁금할 대구, 경북의 숨은 이야기!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 미술 화법이 도입된 것은 191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고희동이라는 화가를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17년 대구 출신의 이상정(시인 이상화의 형)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대구에 서양 미술 화법을 전파한다. 그 후 이인성을 비롯해 서동진, 박명조, 이쾌대, 정점식 등 훌륭한 화가들이 대구의 미술을 빛냈다.
대구는 서울 못지않게 서양음악을 빨리 받아들인 도시였다. 서양음악의 전달자는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대구에 세운 학교에선 1900년 무렵부터 서양음악 수업이 시작되었다. 1910년대가 되자 개인 음악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 활동한 대구의 음악가에는 박태원(1897~ 1921), 김문보(1900~?), 권태호(1903~1972) 등이 있다. 박태준의 형인 박태원은 대구에 서양음악을 보급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는데, 대구 최초로 혼성합창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김문보는 한국 최초의 바리톤 성악가였고, 대구에서 처음으로 독창회를 연 성악가 권태호는 대구음악원을 만들어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또 현대에 들어선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을 작곡한 김진균(1925~1986), 가곡 〈못 잊어〉 등을 작곡한 하대응(1914~1983)을 비롯해 많은 음악인들이 대구 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경상북도 군위군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인각사가 있어서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브랜드 슬로건으로 정했다. 해마다 군위군에선 삼국유사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생들이 참가하여 삼국유사 관련 역사지식을 겨루는 행사인 ‘삼국유사 퀴즈대회’이다. 2019년에 11회 대회가 열렸다.
북성로에서 가까운 인교동에는 <삼성상회터>라는 기념 시설이 있다. 이곳은 한국의 경제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그룹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1938년 인교동에 삼성상회가 문을 열었다. 삼성상회를 세운 기업가는 이병철이었다. 삼성상회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농수산물을 판매하다가 나중에는 무역업도 하였다. 대구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기반을 다진 삼성상회는 서울로 진출하였다. 서울로 진출한 후에도 삼성은 1955년 대구시 침산동에 제일모직을 세워 대구의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삼성은 여러 산업 분야로 진출하여 삼성그룹으로 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삼성전자 등의 계열사를 가진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야경 투어
밤 풍경과 함께 대구의 문화재와 명소 감상하기 

 

스탬프 투어
12곳의 대구 명소를 방문한 후 확인 스탬프 받기 

 

독립운동 흔적 찾기 투어
3・1만세운동길 등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하기 

 

근대골목 나무 투어
대구 도심의 오래된 나무를 찾아 역사와 문화적 배경 살피기

문화재 중에서 근대에 세워진 건물 중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한 것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다.

대구에는 11개의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는데 1922년 민족계 몽운동을 위해 세워진 조양회관, 1923년 설립된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사범 대학부설고등학교)의 옛 본관과 강당, 1930년대에 세워진 역 건물인 동촌역과 반야월역, 동산병원 구관 건물 등이다.

1915년 8월 15일 대한광복회라는 항일조직이 달성토성에서 결성되었다.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힘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대한광복회는 독립군 양성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 친일세력 처단 등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평안도, 함경도에 지부가 생겼을 만큼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918년 일본에 발각되어 조직을 이끌던 박상진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달성토성에서는 이 귀한 역사를 기념하고자 2018년부터 매년 대한광복회 결성 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족제비과에 속하는 수달은 멸종위기종이어서 현재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대구 도심을 흐르는 하천인 신천에서 최초로 수달이 발견되었다. 수달 발견 소식은 곧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수달이 산다는 것은 신천 생태계가 깨끗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019년 무인카메라 등을 이용한 관찰 결과에 따르면 24마리의 수달이 신천과 금호강 지역에서 관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안한 것은 남성들이었지만, 여성들도 적극 동참하였다.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선 부인 7명이 주도하여 국채보상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만든 모금 조직이었다. 기금 모임에 참여한 여성들은 결혼때 마련한 보석 등의 패물을 기부하였다. 대구 패물폐지부인회 활동이 알려진 후 다른 도시에서도 여성들이 만든 모금 조직이 여럿 만들어졌다.

* 김천시의 자두포도축제

* 문경시의 전통찻발축제

* 봉화군의 송이축제

* 상주시의 곶감축제

* 성주군의 참외축제

* 영양군의 영양고추H.O.T.페스티벌 및 산나물축제
* 영천시의 한약및과일축제

* 울릉군의 오징어축제

* 울진군의 송이축제

* 의성군의 마늘축제
* 청도군의 반시축제(반시: 동글납작한 감)

* 청송군의 사과축제
* 칠곡군의 아카시아꽃축제

* 포항시의 과메기축제

대구시 남구의 대표 축제로 매년 봄에 열리는 이 축제는 앞산 빨래터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빨래터공원이라는 이름은 앞산의 맑은물이 모인 곳에 마을 공동 빨래터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축제 기간이 아니더라도 앞산빨래터공원에는 해넘이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서양 현대예술이 이 땅에 전해진 것은 20세기 초였다. 이 때 대구에는 서울 못지않은 속도로 문학, 미술, 음악을 비롯한 서양 예술이 전파되었다. 음악 분야를 예로 들면, 1910 년경부터 대구의 학교에선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관악대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양 악기인 피아노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처음 들어 온 것은 1901년. 이 피아노는 1907년 개교한 신명여학교에 기증되었고, 이때부터 대구에는 피아노를 이용한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초부 터 현재까지 대구는 각 분야에서 많은 유명 예술가를 배출해 왔다.
1907년 대구 시내를 둘러싼 대구읍성 철거가 완료되고, 읍성이 있던 자리에 동서남북으로 새로운 도로가 생겼다. 동성로는 이때 생긴 길로, ‘대구읍성 동쪽에 난 길’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로의 길이는 약 920m로 대구역에서 옛 중앙파출소가 있는 곳까지 뻗어 있다. 동성로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대구백화점인데 1969년에 들어선 건물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대구백화점 앞은 대구 시민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장보고는 청년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항구에 드나드는 일본, 인도, 아라비아 등 각국 상인들과 접하며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훗날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설득해 오늘날의 완도에 청해진 해상기지를 설치했다. 청해진의 총책임자가 된 그는 일본 해적을 소탕하며 바다의 패권을 잡아나갔고, 이를 발판으로 당나라-신라-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할 수 있었다. 해상권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까지 손에 쥐었지만, 결국 장보고의 최후는 불행했다. 평민 신분에서 신라의 권력자가 된 장보고는 경주에서 일어난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고,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1951년 계산성당에서 한 젊은 신학생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한국 천주교를 이끄는 최고지도자인 추기경이 된다. 그의 이름은 김수환이었다. 김수환은 추기경으로 있을 때나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천주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해서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을 ‘귀화’라고 한다. 대한민국에 귀화하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법무부장관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세계화 시대인 까닭에 우리나라에 귀화하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중에는 연예인, 운동선수도 있다.
대구에도 귀화해 대구 시민이 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19년 12월 12일에도 대구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문화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적 증서 수여식에 125명이 참가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귀화인들은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게 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자매도시
미국 애틀랜타시, 밀워키시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중국 칭다오시, 닝보시, 청두시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일본 히로시마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불가리아 플로보디프시

대만 타이베이시
이탈리아 밀라노시

베트남 다낭시 

 

우호협력도시
중국 양저우시, 옌청시, 선양시, 사오싱시, 우한시, 창사시
일본 고베시
베트남 호치민시

태국 방콕시
대만 가오슝시

베트남 박닌성

프랑스 릴 메트로폴시

2003년
세계 대학생 스포츠 대회인 유니버시아드대회(하계 대회)가 열렸다.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World Ener- gy Congress)를 유치하였다. 94개국의 회원국과 에너지업 계, 정부관계자, 관련 국제기구와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국제 행사였다.  

 

2015년
경북과 공동으로 제7차 세계 물포럼을 개최하였다. 세계물포럼은 세계물의 날(3월 22 일) 전후로 3년마다 열리는 행사로 세계의 정부 관계자들, 물 관련 전문가와 NGO 등이 참가한다.

1984년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아스팔트 대신 콘크리트를 써서 포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였다. 단점은 왕복 2차로여서 통행에 불편이 있었다는 것. 그 후 31년 만인 2015년에 도로 전 구간 이 왕복 4~6차선으로 확장됐고, 도로명이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바뀌었다. 길이가 176km인 이 도로는 대구에서 시작해 경상남도 함양군– 전라북도 남원시 지역을 거쳐 광주를 연결한다.

서문시장
조선 중기에 생긴 시장으로 오늘날에도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다. 대구 사람들은 서문시장을 ‘큰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염매시장
대구 약령시가 있는 남성로에 있다. 조선 말기 대구읍성이 강제 철거되고 약령시가 현재 위치로 옮겨올 때 약령시 근처에 생긴 시장이다.   

 

칠성시장
일제강점기에는 과일, 채소를 주로 거래하던 조그만 시장이 었는데, 1946년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상설시장이 열렸다. 그 후 북문시장을 중심으로 상가 건물이 하나둘 생기면서 지금은 대구에서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시장이 되었다. 

 

교동시장 & 남문시장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대구의 인구는 늘어났다. 전쟁 시기에 대구에는 새 시 장이 여럿 생겼다. 교동시장과 남문시장 같은 곳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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