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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궁금할 대구, 경북의 숨은 이야기!


경상북도 청도군은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9년 청도군 신도마을 주민들이 협동하여 추진했던 마을가꾸기운동이 대통령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것이 이듬해 새마을운동의 시작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여 청도군에는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 내 새마을 운동기념관에는 5개의 새마을운동 역사 전시실이 있다. 또 대통령 전용열차모형이 있는 새마을광장, 새마을교육체험학습장을 갖추고 있다.
2010년 하회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경북 경주에 있는 마을이 함께 지정되었다.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양동마을이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 여강 이씨 두 성씨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양동 마을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집들 중에서 16세기에 세운 무첨당, 관가정, 향단은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하였다. 옛 집들이 잘 보존된 양동마을에서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오래된 절 일곱 곳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가운데 경상북도에 있는 것이 봉정사와 부석사이다. 나머지 다섯 곳은 경상남도의 통도사, 충청북도의 법주사, 충청남도의 마곡사, 전라남도의 선암사와 대흥사이다. 이들 7 개의 절은 모두 삼국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절로서, 한국의 불교 역사와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금 50~60대 이상의 어른들이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지로 가장 많이 간 곳이 경주였다. 지금 중학생의 엄마 아빠 사진첩에도 경주에 수학 여행을 가서 찍은 기념사진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수학 여행 1번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경주에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꼭 가는 곳이 있었다. 불국사와 첨성대였다. 이 중 단체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곳은 불국사 앞이었다.
사과는 연근보다 앞서 대구의 특산품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과일이었다. 대구는 분지 지형이라 일교차가 커서 사과 재배에 알맞은 땅이었다. 1899년 대구에 온 존슨이란 미국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 온 사과 묘목을 처음 심었다. 그 후 대구에서는 사과 품종 개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대구 근교에는 많은 사과 과수원이 생겼다.
대구 사과는 맛이 좋아서 한국 사람들이 ‘사과 하면 대구 사과’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또 대구 여성들은 평소에 사과를 많이 먹어서 얼굴이 예쁘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기후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사과 재배지는 대구의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팔공산 기슭에는 대구 사과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은 대구시 동구에 있는 ‘평광 왕건사과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과 재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대구에 있는 여러 공업단지 중에서 최초는 1936년 침산동에 조성된 공업단지다. 이곳에는 직물공장이 제일 많았는데, 1946년 3월에는 한국 최초의 안경 제조 공장인 ‘국제 셀룰로이드공업사’가 입주한다. 현재 대구시는 빈 건물과 공장터만 남아 있는 이곳을 역사성을 살린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관련 사업을 추진 중 이다.

달성공원
삼국시대부터 대구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였던 곳. 문화재로 지정된 토성과 관풍루, 향토역사관 등이 있다. 달성공원역 인근에 있다.   

 

건들바위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명물로 건들바위역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바위 주변에 맑은 하천이 흘러 아름다운 낚시터로 유명했던 곳이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대봉교역에서 걸으면 약 15분 가량 걸린다. 가수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테마로 한 350m의 벽화 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수성못
수성못역에서 내려 만날 수 있는 대구의 명소. 과거 수성구가 도시화되지 않았을 때는 주변의 논과 밭에 물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야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각각의 도시를 대표하는 나무와 꽃을 시목, 시화로 지정하고 있다. 1972년에 정한 대구의 시목은 전나무이며, 시화는 목련이다. 전나무는 곧게 뻗어가는 성질이 있어서 굳은 기상과 영원성을 상징하며, 목련은 순박하고 순결한 시민 기질을 나타낸다.
경상북도에선 조선시대 말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허위(경북 선산), 이강년(문경), 신돌석(영덕) 같은 의병 지도자가 활약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안동 지역에선 이상룡, 김동삼 등의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 이 역사를 기념해 현재 안동에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것은 1601년! 그렇다면 이전에는 경상감영이 어디있었을까? 조선시대에 최초로 경상 감영이 있었던 도시는 경주였다. 경상감영은 태종 8년 (1408) 경주에서 상주로 옮겨졌다. 당시 상주가 교통과 군사면에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상주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까지 경상감영이 있는 도시가 되었다. 이 역사를 기념하여 상주에는 <태평성대경상감영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 상주 거리에선 해마다 관찰사 부임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 크고 작은 나라들이 전국에 있었다. 이런 나라들을 성읍국가 또는 읍락국가라고 한다. 성읍국가는 경상북도에도 여럿 있었다. 사로국 (경북 경주), 이서국(청도), 압독국(경산), 소문국(의성), 사벌국(상주) 등의 나라였다. 이들 나라 중 사로국이 발전하여 신라가 되었고, 나머지 나라들은 시간이 흘러 신라에 통합되었다.
대구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부터 아주 오랫동안 대구의 중심은 현재의 대구시 중구 지역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구는 중구에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80년 전까지 대구에는 5개의 구가 있었다.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였다. 인구와 면적이 늘어나면서 대구에는 새로운 구가 생겼다. 1980년에 수성구가 생겼고, 1988년 달서구가 새로 생겼다. 이어 1995년 달성군이 대구시의 가족이 되었다.
1950년 대구로 피난 온 사람들 중에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1953년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상당수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들이 대구에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현재 대구 도심 동성로 입구에 있는 자리엔 극장 겸 공연장이 있었는데, 이 곳은 전쟁기간 중에 대한민국 국립극장 역할을 하였다.
대구읍성 철거 후 일본은 경상감영 안에 있는 시설들을 많이 철거하였다. 그중 하나가 경상감영 객사(손님들이 묵던 숙소)였던 달성관이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달성관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 사람들은 달성관 앞으로 몰려가 밤을 새워 가며 항의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동원해 농성하던 사람들을 해산시킨 후 달성관을 허물어 버렸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에 동서남북으로 큰 출입문이 있었던 것처럼 대구읍성 동서남북에도 4개의 큰 문이 있었다. 진동문, 달서문, 영남 제일관, 공북문이었다. 대구 읍성이 건설된 후 읍성의 서문 근처에 큰 시장이 생겼다. 서문 앞에 있다 하여 이 시장을 서문시장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문시장은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시장 중 하나가 되었을 만큼 번창하였다. 서문시장은 1920년 대에 지금의 위치(대구시 중구 대신동)로 이전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방은 8개의 도로 나눠져 있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였다. 각 도의 행정과 군사 분야를 책임진 사람은 왕이 임명한 관찰사였다. 관찰사를 감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근무하는 곳이었다. 감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관찰사가 근무하는 곳이었다. 이 건물을 선화당이라고 했다.
대구지하철 1호선역 중에는 반야월역과 안심역이 있다. 한자로 쓰면 반야월은 半夜月, 안심은 安心이다. 이 지명에는 왕건의 전설이 전해 온다. 반야월은 왕건이 견훤 군대에 쫓기다 밤하늘을 보니 반달이 떠 있어서 반야월이 되었다고 한다. 안심은 왕건이 견훤의 추적을 따돌린 후 마음을 놓았다(안심하였다)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현재 팔공산에는 왕건의 전설을 배경으로 조성된 ‘왕건길’, 그리고 왕건을 구한 장수인 신숭겸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첫째, 신라 수도 금성(경주)이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곳에 있어 삼국통일로 크게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는데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구는 동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있어, 통일신라를 다스리는데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둘째, 대대로 금성에서 살아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옮기지 못했을까? 귀족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이전을 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의 수도 이전 계획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신문왕 시대에 대구는 수도 이전 후보지가 될 만큼 군사, 교통에서 중요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현재 대구의 한자 이름은 大邱이다. 邱(구) 역시 언덕을 뜻하는 한자이다. 大丘에서 大邱로 한자 표기가 바뀐 것은 조선시대 21대 영조(재위 1724~1776) 때이다. 공경하고 삼가는 의미로 왕이나 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는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조선시대에 유학은 최고의 학문이었고, 선비들은 유학을 창시한 공자를 우러러 보았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대구의 한 유학자가 대구(大丘)의 구(丘)가 공자(孔子)의 이름인 공구(孔丘)의 구(丘) 자와 같으니 이를 바꾸자고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시간이 흐르면서 大邱라는 한자 표기가 大丘를 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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